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팔가르 해전 (문단 편집) === 넬슨의 계획 === 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당시의 해전 양상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지금이야 바다 어디서든 구축함의 미사일 시정거리 안에 들면 버튼 눌러서 미사일 쏘는 시대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물론 배의 형태 자체는 지금과 같은 세로로 길고 가로로 좁은 형태지만, 무기가 그냥 '대포'였다. 이런 대포들은 포탄이 그냥 쇳덩이라, 쏘면 포탄이 다른 배에 맞고 폭발하지 않고 그냥 나아가던 방향대로 쭉 나가서 다른 배를 관통하는 방식이었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이나 [[대장군전]]도 마찬가지였다. [[비격진천뢰]]를 본 일본군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도 당대의 방식을 초월하는 신개념 무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배의 형태상 함선의 앞뒤에는 포를 별로 놓지 못하고 좌우에만 많이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전후와 좌우의 화력차이가 극심했다. 따라서 내 함선의 측면을 얼마나 오래 다른 배로 향하게 할 수 있는지가 포격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었다. 상술했듯이 함선의 전후면은 화력이 매우 부족하고, 측면의 화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당시 포격전은 '내 배의 전후면은 절대 내주지 않고, 측면만 내줘서 대포를 맞더라도 나도 그만큼은 쏜다.'라는 전략이었다. 그래도 간혹 배와 배가 평행이 아니라 직각으로 만나서 한 쪽이 신나게 얻어맞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는데, 이런 배치는 '종사'(Raking)대형이라고 한다. 즉, 일반적으로는 위의 사진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넬슨의 함대가 어느 지점에서 배를 돌려서, 프랑스+스페인 함대와 평행하게 선 다음 대포를 쏘는 것이[* 일렬로 전열(戰列)을 이루어 싸운다는 소리다. 전열함(戰列艦)의 영어 명칭인 'Ship-of-the-line'도 여기에서 따온 것.] 당시의 해전 양상이었다는 얘기다. 또한, 영국 해군과는 다르게,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포격에 있어서도 '함체'가 아니라 '돛대' 쪽을 쏘도록 훈련했다. 전열함의 돛대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거대한 하나의 나무가 아니라, 큰 통나무 두세 개를 이어붙인 형태였고, 상당히 무거웠기 때문에 밧줄로 선체에 고정하는 형태였다. 흔히 전열함하면 생각나는 그 치렁치렁한 밧줄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바람에서 돛대를 덜 흔들리게 하려고 연결해 놓은 것이다. 어차피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전열함을 보면, 선체보다는 돛대가 더 크게 보이고, 선체에 구멍이 나면 승조원들이 어떻게든 수리를 하여 전투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지만, 돛대를 맞히면 전열함이 그 자리에 서 버리기 때문에 훨씬 전투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당시 함선들은 승조원들이 많은 경험을 쌓지 않는 이상 원하는 대로 기동하기 힘들었고, 함대전에서 일단 난전에 돌입하게 되면 당시의 신호체계는 무용지물이 되어 그냥 일단 적 배에 쏘고보는 전투가 일상이었다. 따라서 승조원들의 숙련도나 장교들의 경험과 대응능력이 떨어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가능하면 난전을 피하고 어떻게든 전열을 구성한 채로, 즉 단순하고 정적인 기동만을 하면서 큰 변화가 없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여기서 넬슨의 신묘한 전략적 사고가 발동한다. 영국 해군은 장대한 역사를 가진 반면, 프랑스 해군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스페인이야 [[아르마다]]가 있었지만, 어쨌든 당시 모인 연합함대 승조원들의 항해나 포격실력은 영국 해군보다 미숙했다. 그래서 넬슨은, '''종사를 당하더라도 어차피 쟤네들은 많이 못 맞힐 거 같으니까, 일단 치고 들어가서 우리가 종사를 퍼붓자'''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전술교범과 반대되는 작전을 구상한 것이다. 이렇게 영국 함대가 이전의 상식인 [[단종진]]과 전열전술을 수행하지 않은 이유는 아래와 같다. 원래 영국은 전열전술에 집착하여 지나치게 경직된 함대 운용을 한 나머지 [[미노르카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이때 희생양으로 책임자인 빙 제독을 처형[*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싸웠던 데다 당시 전열을 깨는 행위를 엄벌하던 영국 해군의 관례로 인해 패전한 것이기 때문에 빙 제독이 억울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국왕 [[조지 2세]]는 빙을 사면하지 않고 끝내 처형했다.]한 뒤, 이 전열 전술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를 하다 대안을 한가지 제시되었다. 리처드 하우 제독이 고안한, 전열을 유지하되 상황에 따라 약간은 융통성있게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크게 개선된 교전법으로, 이걸 그외에 다른 제독들이 연구하여 만들어낸 것이 후에 '넬슨 터치'라고 이름이 붙는 중앙 돌파 전술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유기적인 신호체계와 함대 운용교리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중앙 돌파 전술은 난전시 깃발에 의한 신호가 무력해지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전열내에 적함이 없으면 마냥 노는 게 아니라 지시가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아군함을 지원하는 식으로 움직일 수 있게끔 짜여졌고, 트라팔가르 해전 전날, 넬슨 제독은 각 함선의 지휘관들을 모아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며 그 때문에 해군성에서 함장들에게 따지면 언제나처럼 자신이 모두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면서 그렇게 독립적으로 행동하도록 하였다. 이 중앙 돌파 전술이 채택되자마자 해전의 양상은 아군함 2척이 적함 1척을 사이에 끼고 두들기는 양상이 자주 보이게 된다. 물론 전열 전술이 전혀 쓸모없어졌다거나 영국 함대가 전열 전술을 전혀 사용 안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전열 돌파 전술은 어디까지나 트라팔가르 해전같이 훈련도와 조직력이 떨어진 함대 상대로는 유효하지만 전열이 제대로 구성된 함대를 상대로는 오히려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한 예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 영국 함대의 로드니 제독은 전열 돌파 전술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려고 했으나 당시 프랑스 해군 최고의 방어전 전문가인 드 기생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굳건한 전열을 유지하는 방어적 전열 전술을 구사하자 돌파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전열함들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당시 드 기생 제독은 영국 함대측에서 전열 돌파를 시도할 상황에 대한 대응법이 적힌 교전수칙을 모든 함장들에게 제공하고 그에 대한 훈련과 설명도 충분히 시행해서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당시에는 프랑스 해군의 수병들 훈련이 대단히 잘 되어있었던 것도 프랑스 함대가 크게 활약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유능한 해군 장교들을 잃었고 새로이 그 자리를 메꾼 나폴레옹의 하수인들은 대규모의 함대를 운용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넬슨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아채긴 했지만 조함술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함량 미달이었기에 궤멸을 피할 수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